Wednesday, March 30, 2022

쿵빡


프리다 칼로 <우주, 지구, 나, 디에고, 숄로뜰이 어우러진 사랑의 포옹>

드럼은 '쿵'하고 '빡'한다. '쿵'은 듣는 사람을 깊숙한 심연으로 안내하고, '빡'은 하늘 높이 날아 오르게 한다. 나는 '쿵'도 사랑하고 '빡'도 사랑한다. '쿵'없는 '빡'은 시끄럽고, '빡'없는 '쿵'은 단조롭다.

쿵빡은 오묘하다.

오묘하다는 말은 systematic하게 정의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사실 '오묘함'이란 단어는 결과론적인 단어이다. 나는 뭔가 현재로서 정의할 수 없는, 그리고 살짝의 쾌감(또는 자극)을 경험할 때 그것을 오묘하다고 생각한다. 과거 시점에서 그것은 좋은 것도 나쁜것도 아니지만 미래 시점에서는 왠지 모를 쾌감이 있는 어떤 것이다. 

노자, 예수, 부처,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들은 오묘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노자는 비움과 채움을

예수는 죄와 구원을

부처는 고통과 열반을

소크라테스는 무지와 지혜를 이야기 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무지를 알았기 때문에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었고

예수는 우리 모두가 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구원할 수 있다 말했고,

부처는 세상이 고통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열반할 수가 있었고,

노자는 비움으로써 채울 수 있다고 말했다. 

삶은 참 오묘하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자석의 S극과 N극이 서로 끌어당기는 현상과 비슷한거 같다. 비움이 채움을 부르고, 죄의 인정이 구원을 부르고, 고통의 자각이 열반을 부르고, 무지의 자각이 지혜를 부르는것과 같다. 

하지만, 그 둘은 나눌수가 없다. 물리적으로 자석을 반으로 자른다고 해서 하나는 S극과 나머지 하는 N극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나눌 수 없는 것을 딱 잘라 채움, 구원, 열반, 지혜만을 추구한다. 정확히 성인들이 가르친 것과 반대로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괜찮은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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